그리스도의 심판대
스데반황목사.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대부분의 세상 종교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보기 전까지는 내가 지옥으로 갈지, 천국으로 갈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슬람의 경우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저울이 선행이 악행보다 많은 것을 가리키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캐톨릭의 경우도 그 누구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그들의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갈지, 아니면 연옥 또는 지옥에 들어갈 지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지옥으로 가게 될지 아니면 천국으로 가게 될지 그 결정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는지 아니면 맺지 않는지에 따라 이미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복음을 통해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에서 옮겨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선포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2-24).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당하게 될 때 지옥과 천국을 결정하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편,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자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고통의 장소인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을 보면, 복음을 믿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복음을 믿지 않은 부자는 장사를 지낸 후에 죽음의 장소인 음부로 내려가 불꽃 속에서 불에 타는 고통 중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면 영원히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고 알려주십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
그리스도인이든 불신자든 죽음을 지난 후에는 낙원이나 음부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그들 모두가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 24:15)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영생의 부활로 부활하고,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다니엘 선지자 역시 역사 끝에서는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으로 부활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영원한 수치로 부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1-3).
또한 성경은 두 종류의 마지막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고 불신자를 향한 심판으로써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5장 10절이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한편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은 계시록 20장 11-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그러면 다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살펴 보길 원합니다. 로마서 14장 8-12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바울을 통해 주신 계시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삶에 대해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의 깊은 동기와 의도까지 정확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심판대는 운동 경기 시합과 연결되는 개념이었습니다. 경기나 운동이 끝날 때 판정의 권위를 부여 받은 심판자가, 또는 판정이 매우 어려운 때는 황제 자신이 경기 장에 있는 보좌에서 심판을 했습니다. 승리한 사람은 보좌로 나아와 상을 받았는데 일반적으로 나뭇 잎으로 만든 관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우리는 각각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하여 그분 앞에서 서서 상을 받거나 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상급은 단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대로 각각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심판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어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맺어진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을 이미 얻었으며, 한번 얻은 영생과 구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잃어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그 증거로 에베소서 4장 26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심판은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아니라 상을 받을 것인지 못 받을 것인지에 대한 심판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많은 성도들이 상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알려줍니다. 요한일서 2장 28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실제로 어떤 성도들은 상을 받지 못하는 한편, 다른 성도들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믿음의 행위나 봉사나 마음의 동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공의로우심 가운데 각 성도에게 가장 공의하게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이서 8절은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성도들의 가장 큰 기쁨은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영원히 거하는 것이지 상급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의 즐거움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입어”는 정확하게 맞는 신앙 고백의 내용입니다.
438(495) /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다면 새하늘과 새 땅이 임하였을 때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즐거움과 상을 잃을 때의 비참과 부끄러움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비참하고 부끄러우면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허만 호이트 라는 분이 가장 멋진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그 분은 주의 재림 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성도들의 모습을 졸업식으로 비유합니다. 즉, 졸업식에서 모든 학생이 졸업하면서 마음이 다 즐겁고 가볍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이 상을 받는 것을 보면서 더 열심히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한 점에 아쉬움이 남으며 또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학교 생활에 대하여 후회합니다. 그럼에도 고통이나 비참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을 받는 학생들을 향하여 증오와 미움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졸업의 기쁨보다 상을 받지 못한 슬픔이 더 크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해 상을 받거나 잃을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와 있지만 이 세상에서 주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못내 아쉬움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3장 11-15절에 신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의 그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자질로 건물을 짓는지를 심판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중요한 점은 건물을 짓는 자질이 불에 타는 것과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에 타는 것은 나무, 풀, 지푸라기가 있습니다. 반면 불에 타지 않는 것은 은이나 금이나 보석입니다. 그렇다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들은 무엇을 의미하며, 불에 타는 재료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불에 타지 않는 재료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내는 열매들로서 소위 성령의 열매 내지 성령으로 인하여 내 삶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거룩한 영향력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기를 가지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것들이 불에 타지 않는 재질들입니다. 반면에 불에 타는 것들은 자신 또는 인간들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들로서 이기적인 동기, 교만한 동기, 우월해지려는 동기 가운데 수고한 것을 말합니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불로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위배되는 모든 것은 다 타고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인생은 헛수고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을 보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와 불에 타는 재료를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6).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의 거룩한 불을 통과할 수 있는 공적을 쌓으려면 오직 성령에 따라 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세 가지 면에 대해 내려질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행위입니다. 재능과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귀하게 여겼는지, 모든 관계 속에서 주께서 명하신 책임을 제대로 감당했는지를 보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도고기도를 했는지는 주께서 귀하게 평가하시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다” (시 62:12).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또한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7-8). 이로 보건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분명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의 생각을 포함합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깊은 마음의 동기를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그 동기와 생각을 보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르르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또한 고린도전서 4장 5절에서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고 하고, 계시록을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동기와 마음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셋째는 말입니다. 말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주는 도구로도 사용되지만, 공동체와 나라와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3장 6-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사실 말은 행동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뱉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들을 나타내는지 알려 주시면서 말에 대해 따로 심판하실 것을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5-36). 따라서 우리는 한 마디를 할 때도 주님 앞에서 주의 심판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25-32).
이제 마지막으로 상급과 면류관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성경은 면류관에 대해 말씀합니다. 면류관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상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많이 전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교로 멀리가서 수고하는 사람도 있지만, 학생들과 이웃를 향해 도고 기도로 영혼 구원의 사역을 맡는 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모든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사나시우스 처럼 이단을 분별하여 내어 교회에서 쫓아낸 믿음의 영웅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한 일들은 무한하게 다양하며 또한 수고한 사람의 정성과 마음 자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면류관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상급도 다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어려운 환난을 인내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특히 죽음의 지경까지 견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야고보서 1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또한 계시록 2장 10절이 말합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한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성스럽게 양들을 먹이는 자들에게도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4). 복음을 위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삶을 절제하면서 온전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썩지 않는 면류관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3-27).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주께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사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이 외에도 감추었던 만나, 흰돌 등, 많은 상급들과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계시록 4장을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다는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상급으로 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점을 말씀하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은 결국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한없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상급을 받는 자들의 마음 속 가장 깊은 동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상급이 자기를 위한 영광을 구하는 동기에게 추구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받기에 부적절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무엇을 하든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심지어 주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과 상급 마저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진심이 있을 때만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하심과 더불어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함을 얻은 이후에 그의 인생의 목표는 상급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그는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상급을 추구함은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께서 주실 상을 바라며 힘차게 나아가고 또한 그 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을 가질 때 주께 무한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 지옥의 문제,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을 통과한 우리들은 단 한가지를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주실 상급을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모든 동기도, 우리의 에너지도, 인생도, 주님 앞에 서게 될 심판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공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에 의해 우리의 영원한 상급과 영광이 결정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과 다릅니다. 즉,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인 것입니다. 이 귀한 진리를 마음 속에 두시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그리고 그분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남은 여생을 달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www.imr.co.kr/2040/%EC%A2%85%EB%A7%90%EC%8B%AC%ED%8C%90/data/%EA%B7%B8%EB%A6%AC%EC%8A%A4%EB%8F%84%EC%9D%98%20%EC%8B%AC%ED%8C%90%EB%8C%8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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